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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처럼 4월 1일 우리 곁을 떠난 비운의 배우, 장국영을 기리며
2019. 04.10(수) 14:04확대축소
사진1 장국영의 A thousands dream of you 앨범사진
가요제 입상한 20살의 장국영
아비정전에서 맘보를 추는 장국영


아비정전에서 맘보를 추는 장국영
살아생전 장국영 모습
끝내 세상과 불화한 섬세하고 여린 영원한 청춘



장국영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영화 ‘아비정전’중





홍콩 필름 영화제,

홍콩 영화 비평가 협회

최고 배우상

일본 영화 비평가 협회

최고 배우상

황금종려상,

칸 영화제,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서도 수상

장국영의 음악과 영화들은

홍콩 뿐아니라 타이완

싱가폴, 일본, 한국에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외국 가수 최초로

일본에서만 16번의 콘서트

이 기록을 깬 이는 없다









장국영의 ‘당신에 관한 천만번의 꿈’(A thousand dreams of you)는 어쩌다 가끔 꼭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듯한, 아날로그적 감상이 그리워질 때, 뭔가 헛헛하고 기분이 싸한 때 이 노래를 들으면 응어리진 기분이 풀어지는 듯하다.

는 기분이 든다.

장국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노래를 한번 듣는 것만으로도 언짢았던 마음이 풀어질 만큼 태산 같은 부드러움을 가…. 내성적이고 낯을 가렸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나 스태프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매너가 좋았단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인격자’ 그 자체로 통했다. 조폭들과 각종 괴짜들이 넘쳐나는 홍콩 연예계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장국영 앞에서 착하게 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장국영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람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팬이나 스텝을 가리지 않고 친절했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1956년 9월 12일, 원숭이띠에 처녀자리로 태어난 장국영은 무려 10남매 중 막내였다. 형제들이 많은 가족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세 명의 손위 형과 누나가 어려서 죽는 바람에 실제로는 칠 남매중의 막내로 자라났다. 장국영의 아버지는 홍콩 직물 왕이라 불리던 유명한 재단사였고 말론 브란도나 알프레드 히치콕이 주문할 정도의 명성이 있었지만 반면 가정에는 소홀했다. 장국영이 실제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은 그를 키워준 유모였다고.

홍콩에서 로자리힐 스쿨을 다니다 영국의 리즈 대학교 섬유학과로 유학을 떠났고 그때가 그의 나이 열 세 살 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족들과의 끈끈한 유대 없이 그는 부유하는 섬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가 예민하고 내성적일 수 밖에 없었던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영향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1976년 아버지의 건강악화로 영국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1977년 아시안 가요제에서 2위에 입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우연한 연예계 데뷔와 성공

가수로 성공한 후, 영화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화 영웅본색과 1987년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에 출연하면서였다.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전 아시아 적인 홍콩 영화 붐을 타고 장국영은 빠른 속도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홍콩에 기반을 둔 칸토팝(중문팝)의 창시자중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각종 가요제에 상을 휩쓸면서 그는 1988년과 1989에 가장 유명한 남자 아티스트상과 제이드 솔리드 골드 베스트 텐 음악제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이후 한 인터뷰에서 천안문 6.4 항쟁에 대해서 중국 정부를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크게 논란이 되어 장국영에게는 위기가 닥쳤다. 뿐만 아니라 장국영의 콘서트에서 팬 중 하나가 알란탐의 팬과 싸움을 하다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 일로 인해 장국영은 엄청난 물의를 일으키는 연예인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전격적 은퇴와 캐나다 칩거

장국영은 자신의 이야기가 각종 루머와 가십거리로 전락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연예계 생활에 큰 염증을 느꼈던 장국영은 1990년 은퇴를 선언하고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서 칩거했지만 장국영도 역시 화려한 연예계 생활을 했던 배우이자 최고의 가수였기 때문에 이내 아무도 자신을 몰라봐주는 캐나다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다.

가수 은퇴 이후, 장국영은 아이돌 태생의 배우라는 한계를 딛고 아비정전, 동사서독, 패왕별희, 춘광사설등 당시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아시아전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1995년에는 가수로도 다시 복귀하여 A Thousand Dreams Of You, 추(追), 유심인(有心人), 좌우수(左右手), 아(我)등의 히트곡을 내놓는다.

화려한 복귀로 팬들 만나고

장국영은 1991년에 홍콩 필름 영화제와 1994년 홍콩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수여하는 최고 배우상을 수상한다, 뿐만 아니라 1994년에는 일본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다른 열명의 후보자를 제치고 최고 배우상을 역시 수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황금종려상, 칸 영화제,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도 상을 받게 된다. 장국영의 음악과 영화들은 홍콩 팬들만 사로잡은 것이 아니고 타이완, 싱가폴, 말레이시아, 중국본토와 일본, 한국에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외국 가수로서는 최초로 일본에서만 16번의 콘서트를 진행했고 이 기록을 깬 이는 아직까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가장 많이 팔린 칸토팝 앨범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였다.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사라져

2003년 우울증을 앓던 장국영은 홍콩 만다린 호텔 24층에서 몸을 날렸다. 이때 장국영 나이 향년 48세. 공교롭게도 이날이 4월 1일 만우절인 관계로 이 사실이 보도 되었을 때 모두가 만우절 농담으로 여기고 그의 사망 소식을 믿지 않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9시간 만에 6명의 팬이 투신해 그 중 다섯 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해 큰 충격을 주었다. 홍콩 본토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권의 영화팬 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전염병 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4월5일에 그의 추도식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들이 찾아와 그의 명복을 빌었다. 특히 그와 함께 ‘영웅본색’을 찍었던 주윤발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와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국내에서도 송광사에서 49재를 치르려고 했으나 SARS 확산 우려의 이유로 무산되었으며, 5월 2일에 일산에서 국내 장국영 팬들이 모인 가운데 천도재(遷度齋)가열렸다.

2010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비틀스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음악인으로 뽑혔다. 게다가 CNN은 장국영을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보도했으며 가장 위대한 아시아 25인의 배우 중 한 명이라는 극찬을 보냈다.



전설의 영화 ‘아비정전’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왕가위 감독의 전설적인 영화 아비정전에 나오는 대사이다. 마치 평생을 떠돌듯 살다 쓸쓸히 몸을 던져 우리 곁을 떠난 장국영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이 대사를 접할때마다 아팠다. 그의 죽음이나 성적 취향에 대한 말들이 아직까지도 분분하고 각종 미스터리 사건에서도 자주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와선 장국영이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자살이든 타살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수많은 멋진 작품들, 음악들,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그의 모습과 이젠 더 이상 그는 우리 곁에 없다는 그 슬픔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김세경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회의를 전공하고 대학에서 문화강의 교수로 활동했다. 월드뮤직 애호가이자 전문가로 지역방송에서 대중에게 월드뮤직을 소개하는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호주에서 아트앤 인테리어 데코레이션 공부를 한후 지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신진작가들과 외국인 화가들을 후원하는 전시를 기획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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